일산 외곽의 조그만 창고에서 시작했던 인터넷 쇼핑몰은 매달 점차적으로 매출이 늘고, 수입량이 늘고 성장해갔다. 창고로 찾아오는 손님들도 늘어났다. 남편과 나는 함께 일하면서 항상 다음 단계에 대한 목표를 세웠다. 이때 우리의 목표는 이 창고의 계약이 끝나면 조금더 유동인구가 많은 곳으로 창고형 매장으로 확장 이전을 하자는 것이었다. 창고에서 2년 계약이 끝나고는 정말 목표대로 새로 짓는 건물의 창고형 매장으로 계약을 했다. 외곽창고에서 집으로 가는 중간지점에 새로 짓는 건물이 있어서 건물주를 찾아가 우리가 사용하겠다고 얘기하고 건물자체를 우리용도에 맞게 설계를 약간 변경해서 지었다. 건물주는 건축비를 절감하고 우리는 용도에 맞는 건물을 임대할 수 있게 되어 일석이조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업을 확장해서 매출도 더 늘어나고 직원 4명에 우리 부부까지 6명이 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사업의 결정권이나 진행이 사장인 남편에서 나에게로 거의 넘어왔다. 남편은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했는데 변명인지 진심인지 모르겠다. 남편과 나는 11살 차이가 난다. 자기가 은퇴하거나 먼저 세상을 떠나더라도 아이들과 아내가 잘 살게 나를 트레이닝 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모든 실무적인 일은 내가 하긴 했지만, 법인의 명의는 남편 이름으로 되어 있어서 대외적인 업무, 관공서 업무는 남편이 처리하거나 동행해서 처리했다. 이때부터 나는 내 이름으로 된 사업을 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남편이 법인의 대표로 되어 있어서 든든한 점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실무적인 업무는 내가 처리하고 어레인지 하는데, 회사대표 직함을 달고 있는 남편에게 보고해야 하고, 싫은 소리 듣는 것에 대한 불만이 마음 한구석에 서서히 쌓여가고 있었다.
일산 창고형 매장에서의 사업도 나날이 번창해갔다. 이 시기의 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었다. 출근 시간 9시에서 5분이라도 늦으면 큰일 나는 줄로만 알았다. 고객에게 상담 전화가 오고 매장방문고객이 기다릴 수 있으니 주인이 먼저 출근해야 한다고 심리적으로 압박했다. 매주 수입 컨테이너가 입고가 되므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모든 일정이 매일 빡빡하게 돌아갔다. 수입주문, 매장 사입 확인, 고객전화, 현지통관, 인천항 입항확인, 통관진행, 컨테이너 창고 입고, 물건하차, 택배 포장 후 배송, 고객 CS까지 하루도 긴장을 풀 수 있는 날이 없었다. 사업이 잘되어 갈수록 내 업무 스트레스 강도는 높아졌다. 일에서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고객응대와 고객CS는 쉽지 않았다. 지금은 부드럽게 고객응대를 하고 클레임을 처리할 수 있지만, 이 시기만 해도 나에게 약간의 고집이 있었다. 내가 생각한 기준에서 아닌 것은 고객을 설득하려고 했다. 설득의 기술도 부족했으면서 말이다. 가끔 있는 일이지만 고객과의 언쟁을 피하고 싶었다. 주문이 많아질수록 고객 CS도 많아지니 적당히 벌고, 적당히 일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이 시기에 우리 부부는 또 다른 목표를 세웠다. 이 창고 형 매장이 계약이 끝날 때에는 계약연장을 하지 말고, 우리 건물을 매입해서 건물주가 되자는 것이었다. 대출을 받아야 했지만, 월세 내는 돈에 조금 더 보태서 대출금과 이자를 내더라도 몇 년 뒤에 고스란히 우리 건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즈음, 한창 세종시가 태동을 하는 시기였다. 우리는 일산에서 새로운 대한민국의 중심, 세종으로 터전을 옮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세종시가 한창 터를 잡고 개발을 하고 있었고, 세종시 첫 마을 아파트를 분양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가진 돈으로 세종으로 가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경매 책을 사서 권해주었다. 아내 말을 안 듣는 것 같지만 은근히 잘 듣는 남편은 경매공부를 시작했다. 세종이 어렵다면 세종인근으로 먼저 옮긴 후 나중에 다시 세종으로 진입하기로 계획을 세었다. 주말마다 남편과 아이들과 세종 인근지역을 다니면서 경매로 나온 물건들을 임장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청주지역이었다. 세종과 청주의 경계인 남 청주IC 인근에 맘에 드는 창고가 경매로 나온 것을 확인하고 임장을 가봤는데 꽤 괜찮은 물건이었다. 우리가 경험이 없어서 직접 진행을 하지는 않고 경매 컨설팅업체에 입찰과 명도까지 의뢰를 했다. 컨설팅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스트레스를 덜 받고 시간을 아끼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일은 속속 잘 진행되어 우리가 찍은 건물을 적당한 가격에 낙찰을 받고 명도까지 잘 진행이 되었다.
드디어 우리가 건물주가 된 것이다. 결혼 7년 만에 이루어낸 성과이다. 인천의 작은 오래된 빌라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고, 창고에서 4~5개씩 택배를 보내던 것을 이만큼 성장시켜서 건물주가 되는 짜릿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낙찰 받은 건물을 용도에 맞게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이 건물의 장점은 씽크대 공장이었는데 건물 옆으로 2층짜리 전시장이 붙어있다는 것이다. 2층짜리 전시장을 집으로 리모델링해서 아이 키우면서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 이때 두 아이를 키우면서 뱃속에 셋째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세 아이를 키우면서 일하기 딱 좋은 구조였다. 집에서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가면 창고형 매장도 있고 사무실도 있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사무실과 매장을 오가면서 일할 수 있고, 아이들도 케어할 수 있어 최상이었다.
2층집과 넓은 마당에서 아이들이 뛰어 놀수 있고, 다른 형제들과 친구들을 불러서 바비큐파티를 할수 있는 최적의 건물이었다. 이때는 직원들도 있고 생활도 여유로워서 막내를 낳고 돌봐주는 도우미 아주머니도 두고 생활하고, 나는 직원들에게 일을 맡기고 사무실과 집을 오가며 컨트롤하는 역할이었다.
마케팅공부와 쇼핑몰 운영을 하면서 참 치열하게 살아온 7년의 생활이었다. 이 시기에 육아에 많은 신경을 쓰지 못해서 첫째 딸과 둘째 아들에게는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 있다. 딸은 돌 지나면서 어린이집에 맡겼었는데 사랑으로 잘 돌봐주셨다고 믿고 있지만, 요즘 나오는 어린이집 학대 뉴스를 보면 우리 딸도 학대를 당한 건 아닌지,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도 있다. 둘째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안동 할머니 집에 보내져서 3살까지 할머니 손에서 컸고, 이후 집으로 데리고 와서부터는 또 어린이집으로 보내서 키웠다. 입맛 까다롭고 예민한 아들을 그렇게 키워서인지 그 아들이 지금 사춘기의 절정을 보내고 있다. 어린 시절 못해준 것을 아들에게 빚을 갚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지내고 있다. 이런 시기를 보내면서 마련한 건물이라 더욱 애착이 간다. 하나씩 단계를 거치고 성장해가면서 결국 건물주가 되었다.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면 좋으련만 인생은 새옹지마, 다른 시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